대구한의대학교 학군단,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전적지 답사
대구한의대학교 학군단,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전적지 답사
  • 배종길 편집인
  • 승인 2021.12.07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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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될 학도병들의 이야기 영화 "장사리전투"
잊어서는 안될 학도병들의 이야기 영화 "장사리전투"

<메디테크뉴스=대구> 대구한의대학교 학군단(단장 왕태수) 1,2년차 후보생들은 12월 5일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전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역사를 뒤바꾼 전투, 잊어서는 안될 772명의 학도병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전적지 답사장소로 장사리를 택했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작전을 수행했던 어린 학도의용군, 이제라도 우리는 장사상륙작전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그들의 호국충정과 희생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군번도 없이 포화속으로 뛰어든 숨은 영웅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참배함으로써,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학도병들을 기리며 구국충정의 정신을 가슴에 새길수 있는 기회였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의, 전적지 답사

 

 

<장사상륙작전>

2019년 영화화되기도 했던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부터 9월 28일까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작전명 "174고지" 라고도 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북한인민군 병력 분산 및 보급로 차단을 위해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06:00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제1독립유격대대가 LST 문산을 타고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작전이다.

영화 장사리전투의 한 장면
영화 장사리전투의 한 장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실시되어 양동작전으로서는 성공하였으나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들 학도병을 제외하면 모두 행방불명 상태로 피해가 막심했던 전투이다.

원래는 제8군의 임무였으나, 유엔군의 상륙지점 교란을 위해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부대는 3일간의 물자만 보급받아 9월 14일 2시에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여 교란할 때 다쓰고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 케지아로 인해 LST 문산이 좌초되는 바람에 작전 계획은 뒤틀려버렸다.

발이 묶은 제1독립유격대대는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9월 19일에 유엔군 정찰기에 포착되었고, 해안선을 따라 항행하던 미국 제7함대 태스크포스 77소속 USS 헬레나가 이끄는 포격임무대(bombardment Task Force)의 엄호를 받으며, LST 조치원을 타고 철수하였는데, 일부가  남겨지면서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영화 장사리전투 최성필역의 최민호
영화 장사리전투 최성필역의 최민호

LST 문산은 좌초된 채로 버려졌고, 시간이 지나 1991년 3월 6일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

문산호 선원들은 6・25 전쟁에 동원된 인력이라는 이유로 서훈이 누락됐었다.

이에 해군은 작전에 참가한 생존자 증언을 청취하고, 관련 전사 기록을 발굴하여 2017년 국방부에 선원들의 서훈을 추천했으며, 그 결과 2018년 6월 25일, 대한민국 해군은 민간인 신분으로 전사한 황재중 선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어 2019년 6월 27일 6・25 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문산호의 선원 10명에게도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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